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리히 힘러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 힘러는 자신의 [[슈츠슈타펠]]을 독일군과 맞먹는 군사 조직으로 키우려고 했다. 이런 목적 하에 힘러는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게슈타포 지휘권을 인수받고 독일 전국에 있는 경찰들을 장악했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자신이 더욱 더 큰 권력을 가지려는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이 이유로 지목된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히틀러]]는 무장친위대가 국방군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키워줄 생각은 없었다. 히틀러는 [[돌격대]]가 무지막지하게 커져서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뻔했고 이 때문에 [[장검의 밤]]으로 숙청한 기억을 갖고 있었고, 국방군과의 갈등을 우려한 히틀러는 [[슈츠슈타펠]]이 돌격대 정도의 영향력과 군사조직을 가지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히틀러]]는 국방군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국방군을 견제한다는 목적으로 [[독일 국방군]]과 슈츠슈타펠의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무장친위대]]가 무장을 하고 전투부대를 편성할 수 있도록 국방군이 양보하도록 했고, 대신에 무장친위대가 사단을 편성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고 병력도 국방군의 10분의 1 정도로 제한한다는 협상을 성공시켰다. 하인리히 힘러는 이러한 히틀러의 협상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으나 별 수 없이 결국 히틀러의 결정을 따라야만 했다. 그래도 무장친위대는 [[독소전쟁]] 직전부터는 사단을 편제할 수 있게 되었고 1942년이 지나게 되자 군단을 편성하는 것도 허락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물론 국방군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하인리히 힘러에게 국방장관 같은 자리를 주지는 않았다.] 하인리히 힘러는 나치 집권 초창기부터 악명높은 강제수용소를 총괄하여 운영하였는데 그 시작은 1933년 3월 22일 [[다하우]](Dachau) 근처에 최초의 수용소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다하우 수용소는 나치가 집권하고서 2달도 안 되어 건설되었으며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될 정도로 떠들썩했다. 이 때문에 당시 '자꾸 까불면 다하우로 보내 버린다'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였다. [[장검의 밤]]으로 [[에른스트 룀]]과 [[돌격대]]를 숙청하고 난 이후 SS 백골단(SS Totenkopfverbande)에 독일 지역에서 나치 강제수용소의 관리임무가 배정되었고, 1941년 이후에는 점령지인 폴란드의 절멸 수용소의 관리도 위임받았다. 그리고 하인리히 힘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SD[* 제국보안본부로 불리는 슈츠슈타펠의 정보부.]를 이용하여 [[유대인]], [[동성애자]], [[공산주의자]], [[집시]], [[사제(성직자)|사제]], 반체제주의자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구금하여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하인리히 힘러와 나치는 1933년 3월 22일 다하우에 첫 수용소를 설치한 이후 수많은 수용소들을 시작으로 수백만 명의 대학살을 자행하였으며, 폴란드인들에 대해서는 도로 표지판을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한 많은 폴란드인들을 수용시설에 가두고 학살하였다. 하인리히 힘러는 [[나치즘]]에 광신적인 믿음을 가져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했고, 이로 인해서 그는 '''홀로코스트의 조직가 또는 사형집행관'''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다만 힘러가 광신적일 정도의 나치주의에 빠져서 이런 악행을 저지른 것이라기보다, 오로지 자신의 권력과 부를 위해 이런 악행을 저지른 것이라는 상반된 견해도 존재한다. [[1941년]]에 러시아 침공, 즉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하인리히 힘러는 공산주의자 척결기구를 조직했다. 힘러는 [[나치 독일]]의 독소전쟁을 중세의 [[십자군 원정]]과 비교하는 것을 즐거워하였으며 무장친위대(Waffen-SS)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덴마크]]인, [[스웨덴]]인, [[노르웨이]]인, [[벨기에]]인, [[네덜란드]]인, [[스페인]]인, [[프랑스]]인 등의 지원자들, 그리고 [[러시아]]를 침공한 이후에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우크라이나]]인, [[에스토니아]]인,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 등의 지원자들도 받아서 독소전쟁에 투입시켰다. 그리고 하인리히 힘러는 이렇게 [[독소전쟁]]에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이들을 "신을 믿지 않는 볼셰비키 야만인 무리"로부터 오랜 전통적 가치를 가진 유럽을 수호하는 다국적 범십자군이라고 불렀다. 특히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난 후 러시아 등지에서 나치에 가담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옛날에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소련군 및 소련 경찰 출신 지원자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소련에 대한 적대심으로 인해서 열정적으로 모병을 권유하고 소련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서 조직된 사람들은 위기가 닥치게 되자 곧바로 항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소련군에 대해서 맞서 싸웠던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걸고서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소련군과 끝까지 맞서 싸웠다. 그 이유는 독일군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에서 대학살과 초토화를을자행했기에 소련인들이 독일군에게 엄청나게 분노했으며,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사로잡혔을 때 위 사진의 소련군 포로들이 전부 굶어 죽은 것처럼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무자비했기 때문에, 소련군 또한 보복으로 사로잡힌 독일군 포로들을 죽이거나 무자비하게 학대하고 있어서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끈질기게 끝까지 저항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일이 점령한 [[소련]]의 영토에서 모집했던 자원자들은 대부분이 보조경찰이었기 때문에 소련군과 맞서 싸우는 기간이 오래될수록 소련군에 포로가 되면 아무런 자비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자원한 사람들의 경우 연합국은 그들에게 별 원한이 없었기 때문에 소련군과 같이 가혹하게 대하지는 않아서 서부 연합군에 맞써 싸우려고 전투에 투입된 병사들은 쉽게 항복해버렸다. 이후 힘러는 그 유명한 [[반제 회의]]에 참석해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정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42년]] 하인리히 힘러의 오른팔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프라하]]에서 영국이 파견한 체코 특공대들에게 공격을 받고 사망하자, 힘러는 즉각적인 보복조치를 단행했다. 그는 그들이 탈출했다고 생각되는 리디체 마을로 제7 SS 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에서 차출한 분대를 보내 마을 남자 전체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그들은 마을의 모든 남자 주민들을 학살하며 악명을 떨쳤다. 다만 당시에 힘러와 하이드리히의 사이가 좋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힘러가 하이드리히를 치료하라고 파견했던 의사가 그의 충복 [[카를 게브하르트]]였기 때문에 그가 하이드리히를 죽게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그를 골라 보낸 것이며, 일부러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 하이드리히를 의도적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의혹도 있다. 그러던 중 [[바르샤바]]에서 이른바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발생하자 하인리히 힘러는 친위대에게 이를 진압하라고 했으나, 첫 시도들이 봉기 진압에 실패하자 힘러는 친위대 소장 [[위르겐 슈트로프]](Jürgen Stroop)를 진압대장에 앉힌 뒤 그에게 진압을 맡겼다. 그리고 힘러는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의 생일인 1943년 4월 20일까지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의 제거를 완료하라고 명령했다. 슈트로프의 지휘하에 약 2천명의 [[무장친위대]]가 별도로 국방군 7천명의 지원을 받으며 게토로 이동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여 바르샤바를 생지옥으로 만들고 봉기한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리고 봉기의 핵심조직이던 "유대인 전투조직"의 사령부 지하호를 발견하여 지휘관을 살해하는데 성공하자 그는 5월 16일에 정식으로 바르샤바 게토 봉기진압작전의 종료를 선언하고는 그 기념으로 유대교회당(시나고그)을 박살내버렸다. 슈트로프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때에 '''5만 6000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였고, 약 7000명을 사살하였으며, 체포한 유대인들을 이송하던 중에 또 다시 약 7000명을 처형하여 이전에 죽인 숫자를 합쳐서 무려 총 1만 4000명을 죽였다고 한다.''' 거기다가 '''간접적인 화재 피해와 유탄에 맞아 사망한 폴란드인들만 해도 6천명이 넘었다.''' 저항이 6월까지 이어지는 가운데 한 달 동안의 전투로 6만명의 유대인이 사망했고 100명의 유대인만이 생존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서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슈트로프는 패전 후 1945년 5월에 체포되어 미군 병사 살해혐의로 미군 군사법정에 세워져 1947년 3월 22일에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다시 폴란드 정부로 인계된 슈트로프는 폴란드의 법정에 세워져 바르샤바 게토 봉기진압의 책임자로 다시 사형판결을 받고, 1952년 3월 6일에 바르샤바에서 처형되었다.] [[1943년]] [[10월 4일]], 하인리히 힘러는 폴란드의 도시인 포즈난에서 친위대원들과 비밀 회합 중 유대인들의 절멸에 대해 노골적으로 연설했는데, 이를 포젠 연설이라고 한다. >친위대 대원들은 다음 한 가지 원칙을 절대적인 규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자기 민족에게 정직하고 예의바르며 충실하고 동지애를 가지되, 그 외의 사람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소련인이나 체코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전혀 나와 무관하다. 어떤 민족이 우리에게 좋은 혈통을 제공할 수 있는 경우에는 필요하다면 아이를 납치해서 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우리 문화(Kultur)를 위한 노예로서 다른 민족들이 부유하게 살든 굶어죽든 관심이 없다. 1만 명의 러시아 여자들이 독일을 위해 대전차호를 파다가 피로로 쓰러져도 독일을 위해 그것이 완성되었다면,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절대 거칠거나 냉혹해져서는 안된다. 동물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세계 유일의 민족인 우리 독일인은 인간 동물들에 대해서도 관대한 태도를 견지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그들에게 이상을 심어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혈통에 대한 범죄이다. 그것은 우리의 아들과 손자가 더 힘든 고통을 겪게 만들 것이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해도 좋다. 나는 친위대가 독일 민족이 아닌 다른 이민족, 특히 러시아인들의 문제에 대해서 이러한 태도를 가져주기를 바란다. > >나는 유대인을 소개시키고 유대 인종을 말살하려고 한다. 말로는 쉽다. 모든 당원들이 '우리는 유대 인종을 제거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것은 당의 계획이니까. 우리는 유대인을 제거할 것이다.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다. 그러나 착한 8000만 독일인은 돌아서면 주변에 괜찮은 유대인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론 다른 유대인들은 모두 돼지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 친구만은 훌륭한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것을 지켜보지도 끝까지 수행하지도 않는다. 여러분은 대부분 100구나 500구 또는 1000구의 시체가 나란히 누워 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유대인을 말살하면서 동시에 -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 예외는 제외하고 - 좋은 인간으로 지내는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이것은 이제까지 한 번도 기록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절대 기록되어서는 안 되는 우리 역사의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다. >---- >하인리히 힘러의 1943년 10월 4일 연설 1943년, 하인리히 힘러는 독일 내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자신의 새로 얻은 권력을 이용하여 민간기구의 당 기구로의 통합을 백지화하여 원래대로 돌려버리고 [[게슈타포]]에 소속되지 않은 나머지 경찰 전체에 대한 모든 권력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힘러와 권력 갈등을 벌이던 히틀러의 비서실장이자 나치당 서기였던 [[마르틴 보어만]]에 의해서 결국 이룰 수가 없었다. 물론 히틀러가 반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힘러의 행동들은 히틀러를 점차 불쾌하게 만들었다. 군대와 경찰과 같은 권력기관에서 힘러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서 독일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경찰관들에게 무장친위대 대원의 자격을 강제적으로 준 후 경찰들을 무장친위대로 끌어들이는 등의 일로 인해서 히틀러는 힘러가 [[에른스트 룀]]의 [[돌격대]]와 같은 존재가 될 지도 모르며 힘러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신이 점점 강해졌다. 게다가 마르틴 보어만이 계속해서 히틀러의 망상과 불신을 옆에서 부채질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점차 힘러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게 되었다. 독일군 육군과 무장친위대는 자신들의 기득권 다툼으로 인해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부터 심각한 갈등을 이어왔고, 결국 히틀러는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위에서 보았듯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간의 갈등을 중재해서 무장친위대 병력을 육군의 10분의 1로 제한한다는 합의로 문제를 봉합하기는 했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한 힘러가 우회적인 수단으로, 무장친위대의 숫자를 직접 늘리는 것이 아니라 당시 히틀러가 중재한 협상에 들어가지 않은 경찰관들을 이용하여 '제4 SS 경찰사단 폴리자이'를 조직했다. 이에 국방군은 힘러와 다시 갈등을 빚게 되었고, 히틀러는 이렇게 계속 국방군과 갈등을 일으키는 힘러의 행동을 꽤나 불쾌하게 생각했다. 나중에 전쟁이 [[나치 독일]]의 패배로 확정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많은 나치당원들은 하인리히 힘러가 [[아돌프 히틀러]]의 뒤를 이어서 독일의 퓌러를 계승할 제1순위 후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전쟁 후 여러 자료들에 의해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힘러가 히틀러를 배신해서 히틀러가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그를 나치당원이 더 이상 아니라고 규정하기 이전에도 이미 히틀러는 이렇게 국방군과 갈등을 일으키며 자신의 명령에도 따르지 않는 힘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차기 퓌러로 지명하는 것은 더더욱 생각조차 없었다. 그러던 중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중심으로 첩보부장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까지 가담한 국방군 첩보부(Abwehr) 주도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7월 20일에 발생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 암살 시도 때 죽지 않았고 주모자들은 결국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었다. 한편 하인리히 힘러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진 1944년 7월 20일 하루 종일 라슈텐부르크에서 약 40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자신의 14량짜리 특별열차 안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히틀러의 암살 시도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엄청나게 놀랐고 공황 상태에 빠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권력을 누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이 생각은 훗날 히틀러를 배신하게 되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아직 생존해 있다는 것과 히틀러가 "반역자 무리"들을 처리하고 싶다는 것을 알게 된 힘러는 베를린으로 갈 준비를 했다. 힘러의 마사지사 펠릭스 케르슈텐(Fellx Kersten)이 증언하기를, 그는 기쁜 마음으로 베를린에 도착했다고 한다. 베를린에 도착한 힘러는 히틀러에게 가서 그의 생존을 축하한 후, 그 곳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 총통 각하, 제게 맡기십시오. 힘러가 곧바로 취한 조치는 반역자들에게 처형 중지를 명령하는 것이였다. 관련자들은 모두 [[게슈타포]]의 주도하에서 심문을 받아야 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장기간 동안 [[고문]]까지 받아야 했다. 처형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에야 가능했다. 힘러는 폰 슈타우펜베르크와 그의 동료들이 뜨거운 맛을 보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은 너무 빨리 처형당하는 바람에 철십자 훈장을 단 채로 땅에 묻혔다. 다음날 우리는 그들을 다시 파내서 신원을 확인했다. 그 뒤 나는 시체를 태워서 그 재를 들판에 뿌리라고 명령했다. 그들의 것이라면 작은 흔적 하나라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라 이후 말했다.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히틀러는 [[독일군]]을 매우 의심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1944년 9월 14일, 독일 예비군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은 히틀러 암살 계획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고 계급과 명예를 모두 박탈당했으며, 히틀러는 프롬의 자리에 하인리히 힘러를 앉혔다. 이것은 힘러가 [[슈츠슈타펠]]의 규모를 마구 늘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독일 국방군이 급속히 몰락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심지어 히틀러에게 숙청될까봐 겁을 먹은 국방군 인사들이 자진해서 슈츠슈타펠에 들어갈 정도였다. 이후 하인리히 힘러는 자신이 꿈조차 꾸어보지도 못했던 권력을 손에 얻게 되었다. 그는 예비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국가 내무부를 책임지면서 보안대와 다수의 [[게슈타포]] 스파이들이 배치된 무장친위대 제 38사단의 지휘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암살음모에 가담했던 친위대원들은 놀랍게도 [[아인자츠그루펜]] 지휘관이었던 SS 경찰중장 [[아르투어 네베]] 휘하의 부하들이었는데 사실 이들은 친위대라기보다는 자신들 스스로를 경찰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반면에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된 나치당의 관료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힘러는 [[마르틴 보어만]]에게 약점을 잡히게 되어, 힘러는 더 이상 보어만 만큼은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힘러는 서로 권력 투쟁을 벌이던 보어만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게 되었다. 전쟁에서 독일은 패퇴해가고 있었으나 힘러의 세력 기반은 계속해서 확대되어 갔다. 실패로 끝난 히틀러 암살 시도 이후 힘러는 제 3제국 서열 2위의 권력자가 되었다. 예비군 총사령관으로서 그는 육군 참모본부와 육군 지휘체계에 엄청난 굴욕감을 주었다. 예비군은 완전히 친위대에 종속되었으며, 친위대는 하인리히 힘러의 지휘하에 38개 무장친위대 사단의 편성과 장비, 훈련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했다. 친위대 원수 하인리히 힘러는 인적 자원을 모조리 긁어모아서 15개의 [[국민척탄병]] 사단을 급조하고 '인민의 비밀 전쟁'을 수행했다 떨어진 사기를 억지로 올리기 위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귀관들에게 등을 돌리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체포하고 필요하다면 놈을 포박해서 보급트럭에 던져 넣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이 일은 사단 내에서 가장 정력적이고 가장 거친 장교에게 맡겨라. 그들은 순식간에 어중이떠중이들을 모두 체포해올 것이다. 말대꾸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벽을 등지고 서게 될 것이다." 독일 육군 참모본부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는지는 3만 5천명의 빨치산 우두머리인 '부로 코모로프스키'가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키며 독일군과 대치했을 때를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독소전을 시작할 때에는 독일의 전통적인 육군이 비교적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여 히틀러에게 위협이 되었으나, 모스크바와 캅카스 유전 점령에 실패하면서 동부전구에서의 모든 지휘권을 히틀러가 장악하게 되었다.(당시 동부전구는 독일 국방군 전력에 대부분이 투입된 곳인데, 이곳에서 육군총사령부는 국방군최고사령부와 경쟁을 하여야 했다. 히틀러가 국방군최고사령관이자 육군총사령관직을 겸직, 그런데 여기에 동부전군 사령관이자, 한때는 캅카스담당 집단군사령관직까지 겸임했다. 그런데 히틀러가 있는 곳은 국방군최고사령부였으니 육군총사령부의 참모조직은 사실상 동부전선에서 배제될 수 밖에는 처지였다.) 여기에 무장친위대가 일반 국방군보다 우선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강력한 기갑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빨치산을 상대한 것은 독일군이 아닌 힘러의 잔인한 보좌관 중에서 특수임무부대에서 복무하면서 잘 훈련된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브스키의 병력이였다. 그의 명령으로 디를레방어 형벌부대 병력 4천명과 소련인 탈주자 6천명, 그리고 죄수들이 잔학행위를 자행했다. 국방군의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은 이에 대해서 힘러에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힘러는 구데리안을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친위대가 [[바르샤바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해버리자 1944년 10월 2일 폴란드 국내군은 항복했다. 하지만 힘러에게는 또 다른 걱정거리들이 연달아 생기기 시작했는데, 작은 꼭두각시 공화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슬로바키아]]의 반란이 그 중 하나였다. 반스카 비스트리차(Banská Bystrica)에서 내각과 군부의 일부가 반정부를 선언했지만, 이 반란은 요제프 비티스카(Josef Witiska) 친위대 중령이 지휘하는 특수임무부대 H와 [[게슈타포]]에 의해서 4주 만에 진압되었다. 힘러는 오래 전부터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고, 이즈음부터 그는 망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944년 말에 힘러는 상부 라인 집단군의 사령관이 되었는데 이 부대는 독일 본토로 쳐들어오는 미 제 7군과 자유 프랑스 1군에 대항하여 라인 강 서쪽 강기슭에 알자스-로렌 지방에서 싸우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국방군이 소련군의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저지하는 데 실패한 이후 [[히틀러]]는 힘러를 새로 편성한 비스툴라(Vistula)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문제는 힘러는 협잡질이나 음모를 꾸미는 일, 또는 정적을 숙청하는 일에만 실력이 출중했지,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군사 경험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선택은 재앙이 아닐 수 없었고, 결국 두 달만에 [[히틀러]]는 그의 무능함을 문제삼아 사령관을 [[고트하르트 하인리치]](Gotthard Heinrici) 장군으로 교체했다. 어느 정도로 힘러가 무능하고 생각이 없었는지는 힘러가 구데리안과 했던 대화에서 드러난다. 구데리안은 임박한 소련의 공세를 막을 병력이 없으니 병력을 좀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러자 힘러는 '''"이것 봐요, 상급대장. 나는 소련군이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것은 말도 안되는 허세에 불과하오"'''라는 대답을 보내 구데리안을 아연실색하게 했다고 한다. 집단군 사령관을 비롯한 다양한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힘러는 당시 건강이 좋지 못했다. 그는 후두염과 심한 위경련으로 인해 통증을 호소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호헨리헨(Hohenlychen)의 휴양지로 갔다. 베를린에서 북쪽으로 110km 떨어진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의 마사지사 펠릭스 케르슈텐에게 마사지를 받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의 마사지사 케르슈텐은 힘러의 고해신부 역할을 했다고 하며 힘러는 그를 '마법의 부처'라고 불렀다고 한다. 괴벨스는 당시 힘러를 방문하고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하인리히 힘러는 말년이 될수록 수척해 보였다. 그는 [[괴링]]과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리벤트로프]]의 욕을 했다. 그는 전반적인 전쟁 수행에서 실패의 원흉으로 괴링과 리벤트로프를 지목하며 폭언을 퍼부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그의 말이 맞았다. ...(중략)... 그는 상황을 정확히 요약하면서 군사적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가망성이 없어 보이지만, 조만간 이 전쟁을 우리 편에 유리하게 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말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동부전선보다는 서부전선이 그럴 확률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동부전선에는 아무런 기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하인리히 힘러의 건강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히틀러는 3월 15일에 그를 베를린으로 소환했다. 훗날 증언에 의하면 힘러에게 히틀러는 '전반적인 전쟁 지휘'에 대해서,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군대가 열심히 싸우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서 열변과 독백을 토해냈다고 한다. 히틀러의 장광설을 듣다가 지쳐버린 힘러에게 구데리안이 솔깃한 제안을 했다. 구데리안은 건강을 위해 비스툴라 집단군의 지휘권을 포기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명목상 예비군과 무장친위대의 지휘관으로 남게 된다고 그를 설득했다. 힘러의 후임은 [[고트하르트 하인리치]](Gotthard Heinrici) [[상급대장]]이었다.[* 1886~1971.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전상장 흑장 수훈자. 제43기갑군단, 제4군, 제1기갑군을 지휘하며 동부 전선에서 활약한 야전 지휘관이다. 1945년 4월 말에 이르러 그는 자신의 비스툴라 집단군이 소련군을 더 이상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히틀러에게 후퇴 허락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고, 결국 [[빌헬름 카이텔]] [[원수(계급)|원수]]와 격렬한 마찰을 빚은 끝에 해임당했다.] 그는 경험이 많은 노련한 장군이었으며 구데리안만큼이나 힘러의 군사적 무지에 질린 사람이기도 했다. 하인리치는 힘러를 "훌륭한 장성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조차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평가했다. 사실 힘러의 해임은 그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였다. 여담으로 그와 권력 투쟁을 벌이던 [[마르틴 보어만]]은 힘러의 해임을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헝가리]]에서 히틀러의 요구로 실시된 친위대 정예 사단의 반격이 실패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비난해서 힘러에게 굴욕감을 주기도 했다. 제1SS기갑사단 경호대 SS 아돌프 히틀러(Leibstandarte SS Adolf Hitler)가 정예 친위대 대원을 의미하는 특별완장을 박탈당하자 힘러의 권위는 더욱 추락했다. 그 특별완장은 국가보안본부의 수장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에게 돌아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